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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스케일이 큰 책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읽는 기간도 유난히 길었다. 이 책의 맨 앞부분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07년 가을 즈음일 것이다. 지금 이 책의 본문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지금은 2011년의 한여름이다.

왜 쿠는 이 책을 추천했을까. 이 책이 매우 중요한 내용과 올바른 제안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예전에도 느꼈고 지금은 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른 시점에? 나를 과대평가했을까? 본문 외에 부록이나 주, 스터디 가이드 등 모두를 포함하면 900쪽 가량이 되는 많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분량 때문에 오래 걸린 것은 아니다. 중간 중간 이 책을 읽기를 멈추고 다른 책을 읽었던 것은 내 지성이 이 책이 다루는 범주를 충분히 이해하기에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새 몇 달 못 봐서 만나면 물어봐야겠지만, 내 끈기를 인정해주고 기대한 건 아닐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그 시절 그는 내게 책을 추천해주는 것을 어느 정도 즐겼던 것 같다. 처음엔 손봉호 선생님의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했고, 왜 그랬는지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라는 무지막지한 책을 빌려줬다. 아무래도 내가 이걸 끝내 다 읽고 돌려주는 걸 보고 멀리 보고 권했지 싶다.

아무튼 약간은 무리수였던 이 책은 20대 중반을 나와 함께하며 그리스도인 청년으로서 세계를 마주하는 내 관점을 계속해서 보완하고 자라게 했다. 지금에 와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 강좌 시리즈' 만큼이나 나를 감사하게 하는 고마운 추천인 것을 깨닫는다.

 

'세계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당찬 책. 이 책은 기독교 역사와 그에 따른 시대사상들을 훑으며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야와 지성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책에 대한 후기만큼 나의 입장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 적절한 책도 없겠다. 별로 왜곡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으니 표현 그대로를 들어주기 바란다. 나는 청소년부 교사생활을 약 두 달 전까지 7년 넘게 지속해왔고 그러다가 해임되었다. 아쉽게도 공식적인 해명이나 변의 기회 같은 건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로 그렇게 되었다. 물론 복합적인 상황들이 있었겠지만, 이런 결과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건 내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들을 너무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대표 설교자가 성경의 일부분만을 반복해서 설교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을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내 마음의 중심에 둔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경 66권은 완성된 한 권의 정경으로서 모든 문단과 문장 하나하나가 가치 있고 중요하게 다가온다. 물론 성경의 각 권들이 커다란 이야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인 만큼, 좀 더 자주 읽게 되고 친근감이 더할 수밖에 없는 권 또는 단락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비교적 참조되는 빈도가 낮고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적용점이 그다지 크고 분명해 보이지 않는 권 또는 단락이라 해서 그 부분들을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여길(버릴)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부분은 우리네 모든 성도가 배워야 하며 나눠야 할 범위로서 뺄 것이 없다고 믿는다. 모든 성도들의 신앙적 경험과 성숙도가 일률적인 것은 아니기에 가르침의 내용과 수준은 늘 그들을 섬세하게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모든 함의를 공유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평균 수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려고 애써야 한다고 본다. 이를 부정한다면 굳이 개신교가 모든 개인에게 성경을 제공한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록 그 설교자도 성경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다는 말에 일차적으로 긍정할 테지만, 그의 설교 범주와 태도를 봐서는 교회의 구성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부 핵심(그의 기준에서) 내용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식의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도리어 매주 주일 오후 예배에는 '신앙생활 십계명'이라는 모든 항목이 '복을 받고'로 끝마치는, 굳이 매주 낭독할 만한 가치가 과연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하는 선언문 낭독이 공식 순서로 박혀 있다는 사실은 이 인상을 더욱 짙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교자가 나름의 순수한 신앙으로 오랜 세월 교회를 위해 힘썼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꾸준히 배우는 겸손한 자세를 통해 스스로 바로잡고 익혀야 할 사항들도 분명히 있는데 이것을 은연중에 부정한다는 데 있다. 이런 태도의 저변에는 목회자의 독보적 구별(성도에 비해 역할적인 면을 넘어 권위적으로도 특별하다는)을 지지하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 이해가 깔려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게는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말씀하신 것에서 반석(페트라)이 베드로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베드로 자체를 꽤나 중요시하는 가톨릭의 이해가 설득력이 부족하게 다가오는 것 이상으로 목회자를 선지자나 사도의 위치와 동일시하기를 즐기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 인식도 우습게 느껴진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님의 종으로 세우셨기에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목회자 이외의 다른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우심과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인 것일까. 앞서 언급한 '신앙생활 십계명'에는 "주의 종을 잘 섬기면 자녀가 복을 받고"라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글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은혜의 공로를 의지해서 주님의 자녀가 된 복된 존재가 아닌가. 그런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종으로 스스로를 말할 때는, 그만큼 전적으로 주님께 우리를 맡기고 내어 드린다는 의미로서 고백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주의 자녀이며, 종이라고 표현하자면 누구나가 그분의 자발적인 종의 자리에 설 수 있다. 그렇다면 위 구절의 종은 무엇이란 말인가. 구약적 표현을 빌려 오늘날의 목회자를 구약의 선지자나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동급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직신학과 설교에 관심이 깊은 내게도 설교자, 목회자라는 이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그렇지만 그 자리는 주님께서 완성하신 정경의 내용을 함께 공유하는 입장에서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의미로서 귀한 자리인 것이지, 선지자나 사도들처럼 계시를 이어가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부교역자들이 교역자의 설교에 앞서 '대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겹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겔이 대언한 하나님의 1:1 음성과 목회자의 설교가 동일할까? 과연 목회자는 '하나님 - 설교자 - 성도들'의 흐름으로 단순 도식화할 수 있는 절대적 유일 매개체인가. 이러한 이해는 결코 신약성경의 빛에 충분히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글이 길어지는 것을 감안하면서도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책이 다루는 여러 가지 이분법의 폐해 중 한 부분과 성격 상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완전한 진리Total Truth'에서 '완전한'은 무흠하다는 뜻 보다는 총체적이라는 뜻에 가깝다. 성경의 진리는 이 세계의 모든 부분에 포괄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깎아내리고 만 진리의 이러한 본래 지위를 다시금 깨닫고 인정하며 세상을 향한 사고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시대가 처한 여러 가지 분리된 사고의 형태를 지적한다. 공적/사적 분리, 가치/사실의 분리,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분리와 같은 것들 말이다. 즉 삶을 과학, 정치, 경제와 같은 공적인 영역과 예배 및 도덕과 같은 사적 영역으로 나누어서, 양쪽이 서로 무관하며 침범하면 안 되는 대립관계인 듯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사실은 양쪽 모두가 하나의 총체적인 진리가 적용되는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영향력과 범주를 특정한 부문에 국한시키려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성/속의 분리라는 것이 있다. 목사나 선교사처럼 전임 사역자가 되는 것만이 그분을 위한 참된 섬김이며(성) 다른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속) 특별히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비롯한 소극적인 도덕규범의 수호를 제외하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는 시각이다. 그들의 직업은 애당초 거룩한 영역에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분리된 견해가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가 갖는 권위를 불필요하게 구별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대다수의 한국 교회에서 번듯한 직장 또는 개인 사업을 갖고 주일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꾸준히 드리고 특별한 도덕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만으로도 교회는 성도에게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다 깊이 나아오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그만하면 역할을 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 교회 내에서 할 만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설교자는 올해로 두 번째 예장백석총회 부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결과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장로가 한 명도 없는 장로교회의 목회자가 그러고 있는 모습이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썩 보기 좋지는 않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단지 영혼의 생명 여부만을 결정짓는,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저 생활에 부가적인 행복 요소를 조금 더 가져다주는 정도의 좁은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도 앞서 말한 분리의 경향이 반영된 것일 것이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 정도 더 사역할 수 있는 기간이 남은 선배 어르신 목회자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하실 여지가 있다. 그분들 시대에 배울 수 있었던 여건의 수준을 이해하기에 비난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도 배우기를 게을리 하신다면 참으로 후대에 덕이 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하다못해 그 딱딱한 벌코프조차도 '본래적 통치권'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외에도 개혁신앙을 따르는 내 입장에서는 수용은커녕 이해하기에도 벅찬 현실의 모습들이, 계속 쓰자면 상당한 분량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을 위한 비평이지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지 말라고 하신 그 비판이 아니기에 이 정도만 적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습들이 진정 충분히 성경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 우리에게 적실하다는 것이다(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적실'이라는 표현까지 썼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오늘날 전형적인 한국 교회의 안타까움을 잘 반영하는 공동체에 속한 성도의 경우, 저자가 지적하는 세속적인 다양한 비성경적인 철학과 세계관의 공격 외에도 내부적인 우민화 정책의 압박까지도 잘 견뎌내야 하는 곤란한 포위 상황 속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내가 속한 교회에 몸담게 하신 주님의 뜻을 계속해서 간구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매주 설교에서 앞서 언급한 경향들을 짙게 느끼면서도 염세적인 태도를 갖지 않고 온유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글을 쓰는 내가 소망을 잃지 않음은, 교회는 주님의 몸된 영광스러운 존재이며 그분으로 인해 그 명맥이 결코 끊길 수 없음 때문이다. 아무리 타락의 정도가 심한 교회의 비중이 높고 자성하지 않는 교회가 많다 하더라도, 그분께 온전히 생명력을 공급받으며 주님을 닮아가기에 힘쓰는 교회들도 분명히 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친히 교회를 돌보시고 이끄실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소망의 사실이다. 이 바탕 위에서만이 더 많은 교회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다움으로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현실적인 문제들을 몸으로 부딪치는 신앙인으로서 한국 교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조금 언급했지만, 잊고 싶지 않은 것은 한국어판으로 잘 번역된 이 책의 소중함을 이 시대의 더욱 소중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나누고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전달이다. 지난주에도 교회 동생에게 이야기한 바 있듯, 세계관이란 개념이 단지 추상적이며 학술적이고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한 번도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써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이미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각을 예민하게 점검하고 가꾸는 일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 있을까?

일부 사람들에게는 열린 마음은 있어도 이 책이 다루는 범주가 지적으로 소화하기에 너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실 내 경우가 그랬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계속했지만 아무래도 소설이 주를 이뤘고 청소년기에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입시 때 2년가량 작곡 공부에 전념하기는 했지만 결국 선택한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다. 그러다 보니 20대 초중반까지는 경영학, 컴퓨터 공학 같은 자연 계열에만 경험이 쌓였을 뿐 인문학적, 철학적 사고와 언어 구사 능력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동시에 내가 중학생 시절부터 교회에 거의 꾸준히 참석했던 것을 감안하면 교회의 설교 또한 성경을 그 나름의 관점에서 다루기는 했으나 삶의 문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 진리로서 제시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분들의 경우에는 강영안 교수의 '강교수의 철학 이야기'를 먼저 읽고 이 책에 도전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분의 글은 기본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35세 가량의 기독 청년"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긴 하지만 찬찬히 읽어 나간다면 20대 이상의 성인 모두가 이해하기 쉽게 잘 쓰인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완전한 진리'의 용어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얻었다. 인문학을 싫어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고등학생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입시 현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수능 공부 외에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면 싸늘한 반응을 보일까?

꼭 이러한 종류의 노력이 세계관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될 필요는 없지만, 세계관을 가꾸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전적인 헌신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이런 전인격적인 성화의 과정이 없이는 다음 말씀의 촉구에 반응하는 것도 사실 상 불가능할 것이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 3:15).

나는 이 구절에 대해 진지하게 설교하는 설교자가 이 땅에 늘어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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