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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과놀라운구원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신앙생활 > 영성/성령
지은이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과개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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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주일 아침에 이어, 오늘도 화사하게 비쳐 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돌아봄의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할 수 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해 8월이 저물 때쯤, 런던 여행을 20일 정도 앞두고 큰 감동과 감사함으로 이 책의 1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독후기를 썼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 마음 같아서는 1권보다 얇은 이 책 정도면 해가 바뀌기 전에 완독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8개월이 넘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이 책 저 책 여러 권을 조금씩 읽었는데, 1권 이후 완독한 책만 10권입니다. 결국 20여권을 찔끔찔끔 기웃거린 셈인데, 그도 그럴 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피는 일은 제게 상당히 난해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이 주제에 대해 평소에, 여지껏 충분한 가르침과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 큰 이유였고, 자연히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속도감 있게 읽어나갈 일이 아니라 차분하게 모든 장의 문단과 각 문장을 살펴야 했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제가 가진 성경번역본은 개역개정, NKJV 정도가 다였는데(지금은 How to read the Bible for its worth를 읽으며 보다 나은 번역본의 확충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책과 친하게 지내왔다 해도 성경 본문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번역에 있어서도, 성령 하나님께 대한 호칭에 있어서는 오해의 소지가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께 속한 일을 묘사할 때도 ‘예수의’와 같은 표현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 분이 뭔가 하실 때는 거의 반드시 ‘예수께서’가 쓰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보다 ‘성령이’를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음은 초기 번역 당시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3위이신 성령 하나님께 대한 이해가 조금이나마 부족했다는 사실을 강력히 나타냅니다.
저자가 정리한 교리를 이해하려면 성경 본문에 대한 올바르고 풍부한 이해가 앞서야 했고 이 사실은 저를 성경 앞으로 내몰았는데, 정작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 의미를 넘어(보다 깊은 곳으로) 석의에 기반한 조명과 더불어 이해하는 일은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주석들의 도움을 피할 수 없게 했고 이 과정들은 소중했지만 솔직히 지루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당한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복된 아침에 이 책을 한 번이나마 다 읽은 입장에서 글을 정리하는 순간, 모든 노력과 투자에 대한 후회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주님을 더 닮아 가는 과정(성화) 속에 있고 많은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 있지만, 이 모든 땀은 제 나름의 하나님 나라 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모든 소유(또는 그에 대한 집착)를 버리진 못했지만(마 13:44-46), 이 시간들은 제 나름의 값진 보화였습니다. 이를 허락하신 주님께 온 맘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로이드 존스는 1권에 이어 가장 먼저는 성령 하나님의 인격과 신성에 대해 말씀 안에서 의미를 정돈하고, 그 분의 사역들과 특별히 구원에 있어 그 분의 일하심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하지만 참된 기쁨으로 안내합니다.
그는 7장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사도 요한이 표현했듯 빛이 온 세상에 비췬 것은 사실이며, 다만 어두움이 그 빛의 빛 되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되짚고, 또 실제로 그 분의 인도 아래 빛 가운데 나아와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이들이 존재함을 살핀 다음, 본격적으로 중생(거듭남), 연합, 회심, 확신, 이신칭의, 양자 됨, 성화, 성령 세례와 충만, 인 치심과 보증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까지 다루며 2권을 끝맺습니다.
1권에서는 이미 그 길이 어느 방향인지는 알았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그 길을 걷게 된 느낌이었다면, 2권에서는 이따금 새 길을 발견한 느낌을 받기도 했을 만큼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저의 이해는 많은 채움을 얻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만족할 만치 충분한 묵상이 없었기에 ‘이렇지 않으실까?’라고 일단 생각하고 있던 사실들에 대해 조마조마함을 느끼며 읽어나가다가 ‘휴, 잘 알고 있던 거 맞구나’하며 안도의 한숨도 많이 쉬었고요.
2007년에 중등부 교사였던 저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위주로 구성된 반에서 이신칭의를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책의 16장을 묵상할 때 이 기억이 떠올라서 살며시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지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부여된다는 사실까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알지도 못했고) 적어도 믿음조차 그분의 은혜 없이 스스로 일궈낼 수 없으며 우리에게 어떤 온전한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이에 대해 바르고 섬세한 전달은 부족했지만..) 우리에게 구원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올바로 전했었기 때문입니다. 4년 전의 훨씬 더 애송이였던 저에게 이렇게나마 복음의 한 부분을 전하게 하신 일을 너무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이 단지 거듭남을 말하는지, 이미 거듭난 이들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의 부어짐을 입는 것을 말하는지, 때에 따라 어떻게 적용되는지 너무 무지한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허락된 번역본의 난해함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려운 만큼 신중히 더 겸손히 묵상해야 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느껴지면 ‘나는 지금 조심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주춤하는 일이 우리 안에 넘쳐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담대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거나 담대하거나. 사람들은 이 같은 이분법에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지만, 기독교는 겸손하면서 담대한 그런 놀라움이 있는 곳입니다.
올해 들어 이와 비슷한 상황의 연장선 속에서 마음 아픈 상황들을 더러 겪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느낀 것이, 이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정말 너무도 수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에게 선지자처럼 오류가 없이 말하도록 허락하신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들은 초대 교회의 씨를 뿌린 사도들을 마지막으로 끝났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모든 설명도 어떤 면에서 100%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1권에서 그가 조심스레 지지한 사람의 본질적 구성에 대한 논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도직, 선지자직을 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구약에서 신약까지 66권의 정경이 주어졌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충족시키기(그분의 기준에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의 틀 안에서 그 분의 모든 지혜의 전달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지성을 쏟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로이드 존스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파헤치되 늘 성경의 틀을 신중하게 살폈고, 이를 단순히 지적인 작업에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차가운 지성을 발휘하되, 단 한 순간도(라고 하면 무리일까요) 하나님 앞에 선 남자로서 불타는 가슴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분법을 깨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지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마음이 없어서 올바를 수 없다고요? 지적으로만 추구하는 것은 분명 그릇된 모양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 그분을 예배해야 합니다. 쿠 때문에 보다 깊이 새겨진 구절이 있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며 그의 본성을 닮아 사랑 안에 창조된 우리는 그분이 주신 지성을 발휘하여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드디어 3권을 주문할 차례입니다. 이 시리즈의 최종편이지요.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선배들의 모든 헌신과 피흘림의 산물들에 힘입어 그들보다 훨씬 나은 조건 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통을 멈출 수 없음은, 그 애통의 질적 측면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보임은 참으로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실하시며 뜻하신 모든 일을 당신님의(이승구 교수님의 귀여운 표현 따라 해 봅니다) 계획과 때에 따라, 하지만 주저 없이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주일, 우리를 주일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전, 안식일과 율법이 최선이었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미처 몰랐고 누리지 못했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자녀의 삶을 살아내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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