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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국치가 회복될 사건이 올 때까지 블로그 양쪽은 조의를 표하는 검정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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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난 2010년부터 제게는 매우 현실적인 안건이었지만, 이제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담론이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대표기획자의 ‘다시, 프로테스탄트’가 세간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고(흑, 서평 써야 하는데) 지난달에는 홍성사에서 ‘박삼종의 교회 생각’을 내놓았으며 불과 몇 주 전에 또다시 포이에마에서 ‘교회 안의 거짓말’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2010, 2011년 당시, 제가 겪었던 고충이 부디 저만의 문제이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요 근래 출판계의 흐름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분명 쓰라린 일이지만, 하루 빨리 인정하고 회복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앞서 소개한 책들보다 약 3년 정도 일찍 쓰였고, 주로 쉬운 말들로 쓰여 있어 함께 더불어 읽고 공감하기에도 참 좋습니다. 다만 치밀한 교회사 비평과 함께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저자 자신의 쓰라린 경험들이 녹아들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그 공감이 전해 주는 마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씁쓸하게도, 저자는 교회 속 세상 풍경으로 이야기를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눈길을 끄는 학력 문제도 이 풍경의 한 단면이겠죠. 아직 주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단면들을 유심히 살펴보건대, 단지 일시적인 실수의 수위 문제가 아닌 본질적인 사상의 기초부터 어긋나버린 것은 아닌지 실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병욱, 오정현 두 분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뼈아프긴 하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실수, 그런 죄 지을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시되는 잘못들 자체보다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잘못을 되돌아보는 그분들의 마음가짐과 태도입니다. 그분들의 말과 행동이, 그분들 안에 깊이 파고든 세상의 모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교회 안에 세상이 버젓이 자리 잡게 만든 첫 사건을 추적한 끝에, 비로소 콘스탄티누스를 주목하게 됩니다. 역사가 토인비도 인정했듯, 분명 바울은 로마, 아니 유럽의 역사를 주님의 섭리 가운데 뿌리째 뒤흔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뿌리를 흔드는 측면에서 지속되어야만 했습니다. 성도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고, 교회의 부흥은 결코 눈에 보이는 국가 권력과 손잡는 것을 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참된 안식 대신 거짓 평화Pax Romana를 내세웠는데, 다니엘의 묵시에 그려진 모습처럼 제국의 모습은 그저 무섭고, 놀라우며, 매우 강한 넷째 짐승과 같을 뿐이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루어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정교일치는 단지 형식상의 호의에 불과했고, 그의 정치적 계산에 철저히 맞닿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이어 주목하는 시대는 ‘여왕 마고La Reine Margot’의 배경이 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입니다. 역사에 있어 가정은 금물이지만, 어쩌면 정교일치 없이 전개되는 끊임없는 박해가 교회에 끼쳤을 고난이 정교일치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피의 후폭풍에 비하면 오히려 수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입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기 전까지는 주로 종교개혁이 전해 준 유익에 대해서만 주목해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이라고 꼭 그 무대에서 빛의 역할만 담당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칼뱅의 요한복음 주석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함께 읽었던 저로서는 적잖이 편찮은 마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가 수집한 사료들이 칼뱅을 실제보다 가혹하게 평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전반적으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통찰은 분명 종교개혁을 주도한 헌신적인 성도들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이 권력에 편승해 군사적 위협을 가했을 때, 그 또한 칼로 맞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정치권력에 기댔던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결국 이런 양상은 양쪽 모두로 하여금 서로를 향해 잔인한 대학살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끝으로 중세 이단의 역사를 살피면서는, 이단으로 몰렸던 이들 중 상당수가 실은 온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이단 시비의 원인은 교회 안에 신천지증거장막성전과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불편한 이들을 처리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죄할 죄목이 필요했는데, 이단 시비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죠. 거의 언제나 이들은 잔혹한 칼부림을 피해 다녀야 했고, 11, 12세기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살아남았던 이단 중에는 종교개혁자들과 접촉한 뒤 자신들의 신앙이 프로테스탄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도 발생합니다. 역사의 이러한 역학 관계에 있어서도 국가권력은 절대 빠지지 않죠.


이처럼 쓰라린 피의 역사를 직시하게 된 만큼, 우리의 앞길 또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는 연약한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교회의 교회됨이란 과연 무엇인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금 이어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선 주제들에 비해서는 아쉽게 쓰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 번 쯤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간 다양한 모습으로 생겨난 ‘기독교 + 거시기’에 대한 한계점을 살피면서 이제는 교회(지역 교회)로 되돌아와 교회의 교회됨에 집중하자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고 저 또한 그 아쉬움들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비춰 주는 교회는 과연 어떠한 정의를 갖느냐에 따라 이 해답도 얼마간 달라질 텐데, 제 소견에는 교회가 반드시 일정한 지역 교회의 모습에 국한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양희송 교수님이 제안하는 기독교 생태계가 제게는 더 이상적으로 여겨지는데, 조만간 제가 참여하고 있는 마크마운트에서의 실험이 긍정적인 열매를 가시적으로 맺어 함께 나눌 이야기들이 풍성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혜화동 이음 책방의 추천 도서 코너에 저자가 쓴 ‘헌법의 풍경’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워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이음은 추구하는 방향이 뚜렷한 책방인데, 그 방향에 기독교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그밖에 좋은 책들은 정말 많이 있지만요). 그곳에 저자의 책이 비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저자가, 같은 주제를 갖고 함께 존중하며 대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까지도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소통하기 어렵고 독선적인 인상의 기독교는 딱히 낯선 풍경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실은 2년 전, 이 풍경들을 그려 보려는 시도를 저도 했었습니다. 며칠 고민하다가 제 역량과 시점이 그럴 수 있을 만큼 무르익지는 못했다는 생각에 접고 말았었죠.

이번 성 주간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나타내는 하나하나의 화면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교회됨―이 지니는 소중한 의미들을 함께 되찾아 갈 수 있기를 마음 담아 기도합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저자
김두식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0-01-26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법조계의 이단아 교회다운 교회를 꿈꾸며, 한국 교회를 말하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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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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