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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이해’에 대한 서평 이후 불과 열흘 사이, 참 많은 것과 부딪혔고 많은 것을 외면했다. 다만 주님의 사랑과 한없으심을 인정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만지심이, 새롭게 하심이 정말 감사하다.

예전에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강요’를 조금 참고한 적은 있지만, 칼뱅(Jean Calvin, 본명은 Jehan Cauvin)의 글을 제대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9년에 신약을 차근차근 묵상하기로 마음먹었고, 시작은 마태복음이었다. 지난해에는 요한복음을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고, 책을 고르려던 중에 칼뱅이 떠올랐다. 한번쯤은 칼뱅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유는 당연히 교회사에서 칼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보편적(Catholic) 교회를 표방해온 가톨릭이 종교개혁과 더불어 구교로 불리게 되었고, 나는 그 개혁의 산물인 신교(Protestant)의 고백을 나의 주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그 개혁의 중심에 서있었던 칼뱅의 삶과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내 신앙의 뿌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물려주는데 있어 매우 주요할 것이다.

이 번역본의 원전은 1553년 1월 1일, 칼뱅이 제네바에서 성도들에게 헌정한 요한복음 주석이다. 원문을 바로 번역한 것은 아니고, 미국 Eerdmans 출판사의 파커 역본을 규장에서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했다. 칼뱅은 자신의 첫 주석으로 로마서를 다뤘는데, 국내에 파커 역본으로 정식 소개된 첫 주석은 요한복음이다(2010년 7월). 덕분에 이렇게 요한복음을 통해 칼뱅과 대화한 소감을 나눌 수 있어 즐겁다.


이 책은 요한복음의 제 1장부터 9장까지를 다루는데, 복음서와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칼뱅의 애티튜드는 그의 글 곳곳에서 빛난다. 칼뱅이 살았던 중세의 경우 ‘4중적 의미의 해석’이 오랫동안 지지받던 시절이었는데, 이는 성경 기자가 의도하지 않은 알레고리를 독자가 임의로 잘못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태도였다. 역사적, 문맥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말씀의 본래 의도를 찾으려는 칼뱅의 석의(Exegesis)적 해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본받을만한 좋은 모델이 된다.

요한복음은 4복음서의 나머지 공관복음과는 특성이 조금 다르게 분류되는데 마태는 예수님의 육신의 족보로, 마가는 세례 요한의 행적으로, 누가는 세례 요한의 출생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반면 요한은 직구를 던진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존재이신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구약 예언의 일부분은 당대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피부에 와 닿는 급박한 현안이었을 수 있겠으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긴 서사시적인 내용들이 지니는 의미가, 특정 주제나 메타포로 정리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의 첫 장은 표현 하나하나를 어떻게 뭉뚱그릴 수 없을 만큼, 주님의 빛으로 촘촘하다. 칼뱅은 그 면면들에 유의하면서 치열했던 당시의 교리적 현안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돌아보며, 무엇보다 말씀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산상수훈도 그렇고, 공관복음은 대체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시선을 두면서 각각의 상황들 가운데 그분의 행적과 설교―청중은 일단 잠자코 듣는―를 서술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을(아마도) 미리 접한 요한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첫 기적에 대한 사건 이후로는 그분과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성전 청결 사건에서 유대인들과, 어느 밤 주님을 찾은 니고데모와, 수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갈릴리에서 왕의 신하와, 베데스다에서 병든 이 및 유대인들과 그리고 몇몇 사건들 이후 9장에 이르기까지 주로 바리새인들과 계속해서 대화하시는 주님을 요한은 놓치지 않는다. 칼뱅은 아버지께로부터 위임받은 직분을 온전히 수행하시는 그리스도께 여전히 주목하고, 대화 속에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분의 어떠하심, 성부 하나님과의 특별하고도 유일한 관계 그리고 유대인들의 답답한 상태를 대조하면서 또한 우리에게 믿음의 진보를, 영생의 은혜에 겸손히―그리고 전적으로!― 기댈 것을 간절히 촉구한다.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위태해 보이는 상황들 속에서 거침없이 복음을 선포하실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아직 그분의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라는 표현을 다루며 성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 마음을 돌아보도록 돕는다. 잔혹한 길로 보내는 마음과 그 길의 끝에 도달하기까지 보호하며 주목하는 마음. 그분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헤아리랴마는. 마커스의 최근 앨범―Our Savior Jesus Christ― 타이틀 곡 ‘그가 오신 이유’는 요한복음을 통해 드러나는 영광을 이와 같은 가사로 노래한다.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킨 우리의 창조주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로 아버지 뜻 이루셨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의 길!’


시리즈의 첫 권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 품질이 고르지 못해 조금 아쉽다. 나는 초판을 읽었는데, 칼뱅의 논리가 워낙 첨예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장의 전달력이 떨어지는 경우를 발견할 때가 잦았고, 뒷부분에는 오탈자도 좀 있었다. 부디 쇄를 거듭하면서, 신앙의 선배들이 어설프게나마 꾹꾹 눌러 담아 출판하셨던 옛 전질 주석보다는 정갈한 완성도를 보였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칼뱅은 왠지 이정표 같은 느낌이다. 신약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와 내가 경험하는 교회 사이에서, 역사의 끈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초대교회보다는 지금에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그는 지금과 자신의 시대를 연결해줄 뿐 아니라―칼뱅도 우리도 동일하게 요세푸스를 참고하는 것처럼― 자신보다 앞선 교부들의 이야기까지도 전해주며 마치 연결자의 역할을 수행해주는 듯하다.

더불어 칼뱅이 겪었던, 복음 수호를 위한 선한 싸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리적 제약에 따라 예배당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지만, 주님께서 머리되시는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는 만대에 걸쳐 단 하나다. 따라서 참된 복음도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칼뱅의 해석이 아무리 탁월한들 100% 완벽할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복음에 겸손히 매달려있는지, 그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성령님의 비추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자매가 내게 ‘농도’를 말했다. 우리가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비교적 평온해 보이는 나라에서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목숨을 건 전도사역의 최전선에 있는 어떤 이와 비교하더라도 삶의 농도는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복음을 대면했다면 하나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때와 방법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으나, 물과 기름처럼 다를 수는 없다. 결국 바울의 삶의 농도, 칼뱅의 삶의 농도를 마주할 때도 동일한 애티튜드여야 한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날 때부터 맹인 된 이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칼뱅에게 베푸셨던 것처럼, 우리 영혼의 눈에도 손수 흙을 발라 짓이겨 주시니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와 승천을 칼뱅과 함께 나눌 제 2권을 기대된다.



칼빈주석 요한복음. 1

저자
존 칼빈 지음
출판사
규장 | 2010-07-2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기독교 최고의 주석 그 중심에 ‘칼빈 주석’이 있다!목회자와 평...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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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ps. 누리야 맛있게 잘 먹었어. ^-^

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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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6 07:40 신고 흐르는 강물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날 기독교회의 복음과 정반대되는 예수님의 천국복음
    http://blog.naver.com/svid/20157423245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2012.07.04 14:19 신고 One of Remnants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갑습니다.

      정반대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때도 곧잘 있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주님의 신실하심은 늘 오롯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소망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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