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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과 2012년을 잇는 지난겨울은 계절로서의 겨울에 그치지 않고, 나의 일상과 학문 세계에까지 차가운 겨울을 선사했다. 그리고 여느 겨울 못지않게 매우 추웠다. 그래도… 봄은 왔다. 여지없이. 2012년의 첫 서평을 쓰는 지금, 이미 5월이 그윽하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글은 유난히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사를 전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글에는 글이어서 지닐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이 있다.

 

글은 단지 말의 기록이 아니다. 기술의 발달로 소리도 녹음해서 보존할 수 있는 오늘날이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소리는 발생되는 바로 그 시점에 누군가에 의해 들려지지 않으면 무의미해지는 휘발성을 지녀온 반면―물론 소리에는 소리만의 매력이 있다― 글은 다르다. 글을 사용하면 소중한 이야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고, 그 구조나 형식에 따라 시, 수필, 이야기 등 다양한 형태를 빌려 전달력을 더하기도 하는데다, 기록물이 손상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최초의 내용 그대로를 보존할 수도 있다.

 

애고. 그런데 글과 말 모두, 이따금 산으로 간다. 꽤 오랜만에 키보드에 손을 얹은 터라 마음이 들뜬 나머지 두서없이 쓰긴 했지만, 그래도 글이 지니는 최상의 영예는 역시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쓰였다는 점일 테다. 그분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지금은 완결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66권의 글. 성경.

 

주님께서는 당신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기쁨과 감사로 인정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돕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 믿음의 글들을 시절을 따라 허락하셨는데, 그 가운데 한 권과 함께한 소감을 적고 나눌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이번에 읽은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은 로이드 존스의 3권짜리 교리 강좌 연속물의 마지막 권인데, 교회론과 종말론을 다룬다.

 

스물세 개의 장을 통해 교회의 의미(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도 더불어), 말씀 선포, 성례(세례와 성찬) 집행과 권징으로 말할 수 있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징, 사람의 죽음, 재림, 부활과 심판에 대해 배웠는데, 이번에도 역시 잘 모르고 덮어두고 있었거나 잘못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을 지도받을 수 있어서 기뻤다.

 

조직신학을 처음 시작할 때는 솔직히 멋모르는 호기심도 한 몫 했었는데(소그룹으로 잠시 공부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전해준 신선한 자극 덕분에),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부끄럽게도 욱하는 마음도 컸었는데(당시 주로 들었던 설교들에 대한 역겨움 때문에),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조금씩 깨닫는 과정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말씀들이 하나의 진리로 연합되며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하나 내 마음에 들리기 시작하는 일―참, 그러고 보니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4장에서 이 소중함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들은, 늘 감사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덤으로 얻은 유익을 몇 가지 생각해보면, 늘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경이 그려주는 테두리 안에 거하는 균형 감각이다.

 

물론 다른 면보다는 공통된 모습이 훨씬 더 많지만, 우리는 워낙 다양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또 그보다 더 다양한 성향을 부여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같은 성경을 똑같이 대하더라도 조금씩은 그 받아들임이 다를 수 있다. 너무나 분명하게 반복해서 일러주신 말씀에 대해서는 이견이 생길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두가 동일한 이해를 지니기는 어려운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그 놀라운 사랑의 말씀이 지닌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우리의 지성을 초월한다는 사실이 그러한 인정의 토대가 된다.

 

얼마 전 교보문고와의 인터뷰에서 밝히신 것처럼 이재철 목사님께는 우징숑의 ‘동서의 피안’이 이러한 균형 감각을 자극해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은데, 내게는 로이드 존스가 교리 강좌 내내 보여준 한결 같은 자세와 순전한 기독교의 머리말에 담긴 루이스의 말―저는 영국 성공회의 지극히 평범한 평신도로서, 특별히 ‘고교회파’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저교회파’적이지도 않으며, 그 밖에도 별다를 데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이 그랬다.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나라 개신교 안에서도 그렇게 많은 분파가 생겨 버린 건지. 자연스럽게 무리 지어진 경우보다는 ‘그리고 주님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며’라고 선포하는 에베소서의 말씀에 반하는 예가 많았던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개인적으로 교리를 공부하는 일은 나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는 일에도 시기적절하게 도움을 준 적이 많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신앙을 가진 분들이 내게 접근한 적이 많았다. 내가 이단 분들을 애써 찾아다닐 일이야 없지만, 내게 접근하면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믿는 영광의 주님이 부끄럽지 않았고, 정말 그들이 옳다면 내가 배워야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라고 생각했다. 마음 속 어딘가 교만한 마음이 숨어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논쟁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주로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분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이 성경 이해에 대해 드러내는 자신감은 나를 정말 당혹스럽게 했다. 그분들이 믿는 기성교회에 대한 교리를 알게 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긴 한데, 어쨌거나. 잠깐 접근했다 떠난 신천지 분 중에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현재진행형으로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기에 짚어줬더니 연락이 사라지는 어설픈 분도 있었고 길게는 수개월을 정기적으로 만나서 성경 본문을 읽고 토론―그래도 우리는 번갈아가며 기도로 시작하고 마쳤다―했던 분도 있었다. 그분이 악의적으로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설명이 옳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길게 대화했던 그분과는 결국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정리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끊어졌다. 그분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해석법을 적용할 때 그려지는 일관성을 주장했고, 나는 그 일관성 이전에, 사용된 해석법이 지닌 근본적 비논리를 계속해서 지적했다. 결국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건강한 상식이 중요했다.

 

그 뒤로 내게 접근하는 신천지 분들께는 이미 수개월 이상 동일 교단의 전도사님과 대화해 봤지만 도무지 올바른 진리로 인정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권해드렸다고 말함으로써 쉽게 정리되는 예가 대부분이었고, 최근 1년 반 정도는 이런 분들의 접근이 뜸한 상태다.

 


어떤 사람들은 조직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그릇된 교조주의에 빠져서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염려부터 표할 때가 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올바른 신중함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는 정죄는 복잡하게 잘못 꼬인 교리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 앞에 삶의 전부를 드려 나아가지 않는 게으름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 삐뚤어진 교의도 나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통해 허락하시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안주하는 태도는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는 강해설교 보다는 주제설교에 익숙하고 또 선호한다. 복음주의도 주제설교도 그 자체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데, 주제설교가 주류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문제가 좀 있다.

 

― 완전한 진리 10장. 제2차 대각성운동 중에서 인용.
부흥운동은 신학교도 변화시켰다. “사역자를 지적이며 가르치는 지도자로 보던 청교도적 이상은 서서히 약화되고, 대중적 운동가요 설득자로 보는 복음주의적 목회자상이 자리 잡았다” (중략) 설교의 방식도 변형되었다. 성경본문에 대한 강해가 교인의 절실한 필요를 다루는 주제설교에 밀려났다. “앞선 시절에 사람들은 사역자가 포괄적인 지적[신학적] 체계를 회중들에게 제공하리라 기대했었다”

 

여러모로 우리는 말씀 앞에 보다 진지하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설 필요가 있다. 지성을 비롯한 우리의 전인(全人)을 동원해서!

 


다시 돌아와서, 로이드 존스의 교리 강좌는 벌코프 조직신학 등에 비해 그 깊이와 탁월함에 있어 부족한 것이 없음에도, 설교 형식으로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신학을 주로 공부하는 목사후보생이 아니더라도 배우기 쉬운 편이다.

 

언젠가 나눴듯 모든 그리스도인이 꼭 조직신학이라는 형태로 말씀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설사 그런다고 한들 문제될 것은 없을 만큼 유익한 훈련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시기에 건강한 방향으로 적용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해보면 알겠지만, 조직신학을 공부하려면 성경 본문을 읽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많이 미숙하지만, 로이드 존스의 교리 강좌를 통해 얻은 유익이 칼뱅의 요한복음 주석을 읽는데 보탬이 되고, 칼뱅의 글―양용의 교수님과 이승구 교수님의 글들을 거쳤기에 조금이나마 수월할 뿐 역시 어렵다―이 또 로이드 존스의 강의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며, 이러한 유익들이 또한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본 회퍼와 같은 믿음의 선배들의 글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보탬이 되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것은 정말 가슴이 뛰는 일이다. 동시대를 함께하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주님이 머리되시는 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유익들은 조화를 이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세 권의 연속 강의를 모두 합하면 여든한 장이 되는데, 로이드 존스의 강의와 성경 본문을 함께 하던,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주석을 함께 하던, 어쩌면 혹독한 과정―경쟁이 치열한 산업 분야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현대인일 경우 더욱―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복음을 더 온전히 직시할 수 있다면. 십자가가 무겁다고 도망치지 않을 수 있다면. 아니 들어 보기라도 하려면.

 

주님께서 은혜로 깨우쳐주신 진리의 말씀과 그 영광이 공부하는 매순간 분명하게 실재했었음에도, 게으르고 분주한 일상 속에서 놓쳐버리고 만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몇 주 전, 강단에서 이신칭의를 설교하시던 정한조 목사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신칭의는 마치,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는 아이의 손을 훌륭한 미술가가 붙잡고 함께 그려줄 때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님께서 낡은 본성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내 안에, 거듭남의 은혜로 새 생명의 캔버스를 주셨는데, 아직도 겨우 밑그림을 그린 느낌이다. 이 밑그림 위에 주님께서 그리실 그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하며 기대할 수 있다.

 

―그분의 계명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출판사
부흥과개혁사 | 2007-07-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교회에 복음과 설교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낸 20세기 최고의 강...
가격비교

 

SONY | NEX-3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80sec | F/3.5 | 0.00 EV | 18.0mm | ISO-800 | Off Compulsory

2011년 6월 12일 저녁의 치덕이. 이 책. 저 책.

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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