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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이야기.1:로마는하루아침에이루어지지않았다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세계사
지은이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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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역사를 다룬 책을 읽고 소감을 적습니다. 최근 ‘십자군 이야기’로 또다시 주목받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인데요. 제가 좋아서 읽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도 쿠의 추천작임을 밝힐 수밖에 없네요. 아이참. 쿠는 젊은 시절 일본 유학 경험이 있어서인지 주목받는 일본 작가의 책을 이따금 소개해주곤 했습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도 그 중 하나였고, 지금 나누는 ‘로마인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저 나름의 자라나는 계절에 따라 집중하는 분야에 맞춰, 또 그날그날의 정서에 맞게 여러 책들을 돌아가며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첫 권은 작년 초봄 즈음부터 읽기 시작했고요.

 

그런데 이런 독서 방식에는 때마다 느끼는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도 있지만, 책의 내용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몰입의 수준을 늘 만족스럽게 유지하며 읽어나가기에는 다소 어려운 문제도 있습니다. 그 정도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저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 5분에서 10분 정도를 예전에 읽었던 부분을 되살피며 제 기억과 책의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이 경우에 대처합니다.

 

이런 제 독서 습관에 따라, 읽기 시작한지 1년도 더 지난 이달 초에도 1권을 다 읽지 못하고 끝부분을 조금 남겨두고 있었는데요. 제가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한길사가 주최하는 독후감 이벤트를 보고 갑자기 의욕에 불탄 나머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3권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네요. 때마침 허리 치료 때문에 다른 활동에 제약을 받아서 찬찬히 읽기에 더 좋았고요.

 

비록 15권 모두를 읽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독특한 역사 서술 방식과 특유의 관점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역사에 관심이 참 많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진지하다면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입술을 주목할 수밖에요. 어쩌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한 뿌리의 인류라는 면에서는 넓은 의미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로마인은 특정 부문에 있어서는 늘 주변국들보다 특출하지 않았는데, 그런 로마인들이 어떻게 그 틈바구니에서 꾸준히 융성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손에 쥐는 제국으로까지 성장했는지가 저자의 관심을 끌었다고 하는데, 그런 저자에게도 이런 동기들이 동일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목표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 하지요. 그렇지만 이런 저의 애정에 비해, 실제로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 특히나 서양사는 더욱 그렇죠. 고대 로마가 주변 국가들에 미쳤던 광범위한 영향력을 감안하면 고대 로마사는 서양사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에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사실 중심의 역사 서술에 좀 더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어릴 때 삼국지를 정말 좋아해서 여러 판본으로 완독하고는 했는데, 읽는 즐거움을 위해 소설적 요소가 다소 가미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었지만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쉬운 감도 있었습니다. 후에 정사와 달리 이런 편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시무룩해 하기도 했죠. 아무래도 연의를 읽으면 유비나 제갈량 같은 주연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더욱이 소년 시절에 말이죠.

 

그 외에 시리즈를 완독한 작품은 중학교에 갓 입학해서 읽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도 역시 고대 이집트의 풍요롭고 신비로운 세계 속으로 저를 이끌기는 했지만, 강렬한 인상에 비해 객관적인 이해를 체계적으로 전해주지는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집트의 인상을 전하고 싶은 것이 저자의 마음이었겠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저자는 철저하게 사실 위주로 로마인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저자가 강조한대로 단순한 역사보다는 로마인의 소행을 썼다는 점에서 ‘이야기’로 제목이 정해졌지만, 실제 저자의 서술 방식도 이야기의 형식을 빌립니다. 그래서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가져오는 지루함을 덜어주기도 해요. 때때로 현대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주장하기도 하고요. 어쩌면 저에게 있어 이처럼 철저하게 사실 위주로 기술된 역사는 성경에 포함된 역사를 빼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런 면면들 덕분에 저자의 견해가 나와 잘 맞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지금 내가 숨 쉬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를 전해 들음과 동시에 저자의 과감한 분석에 동참해 나만의 생각을 정리해보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여행 준비의 이유로도 로마는 제 마음을 끌었는데요. 청년 취업 문제와 빈부 격차 심화 같은 사회 문제가 붉어지면서, 여행조차도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는 또 하나의 욕심이자 스펙 쌓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20대가 지나기 전에 재정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해외여행을 떠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정말 건강한 여행을 다녀오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저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미와 남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는 욕심 때문에 여행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방문하는 대륙, 나라에 가면서 그 곳의 역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심하게 발을 내딛는 것은 조금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주로 대표적인 유적, 유물과 현재 도시의 외관적 인상에 대해서만 새롭고 멋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곤 합니다. 그런데 정작 특정한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그곳이 지닌 역사나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거나 얕은 지식만 가진 채 추억의 사진만 몇 장 간직한 경우도 보았습니다. 무려 그 자리에 서있었는데 말이죠.

 

저도 몇 주 단위로 유럽 여행을 해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 당장 보내준다면 조금 망설일 것 같습니다. 좀 더 여행지 곳곳이 가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만나러 가고 싶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도 ‘로마인 이야기’는 저의 좋은 친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christian이기 때문에 로마는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로마의 패권이 강력했던 시기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살피는 것은 성경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로마인은 그리스에 패권을 행사하는 입장이면서도 자신들의 라틴어를 강요하지 않고 헬라어를 함께 사용했는데, 신약성경은 대부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요.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로마가 임명한 속주(프로빈키아) 총독이었고,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 정도는 들어봤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울의 선교 범위는 로마의 통치 영역과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3권에 등장하는 도시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는 아마도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안디옥과 다메섹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성경과의 연관성들도 제가 로마에 관심을 갖게 하는 큰 이유입니다. 저는 세계사에 골고루 관심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교회사가 있으니까요.

 

 

저자는 첫 권을 쓸 때부터 이미 이 시리즈의 전체 윤곽을 계획하고 있었던 만큼, 갓난아기 시절의 로마부터 차근차근 서술해나갑니다. 기원전 7세기 중엽의 첫 왕정 시절부터 공화정으로의 체제전환을 통해 본격화된 로마의 성장과정을 전해주면서 로마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주변 도시 국가들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설명해주지요.

 

저자의 시도 중에 몇 가지는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로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는, 당시의 로마인과 주변 민족들이 로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여겼는지를 정확히 전해주려고 노력한 일입니다. 이런 시도는 역사의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하고자 애쓰는 저자다운 모습이죠. 그럼 ‘로맨틱’이라는 표현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서양에서 쓰이기 시작했다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가 주는 어떤 인상에서 이 단어를 끌어냈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저자는 역사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때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보다는 올바로 이해한 실제적 현상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이제 20대 후반에 접어들었는데,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 먹을수록 예전에는 엄청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차차 이해가능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역사는 달라요. 아직도 역사는 너무나 광대하고 커다랗습니다. 그런 역사 앞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열정과 태도는 참 멋집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등장한 수많은 사료를 빠짐없이 섭렵하는 모습에서도 느껴지죠.

 

특별히 1권에서 자신이 왜 2천 년 전의 세 그리스인의 역사관에 공감하는지를 말해주는 세 가지 이유가 참 인상적입니다. 첫째는 로마의 흥망성쇠를 정신적인 면이 아닌 제도적인 면에서 바라봤다는 점, 둘째는 기독교를 몰랐던 로마인을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은 둘째와 조금 비슷하지만 자유와 평등처럼 근대에 두각을 나타낸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을 드는데요.

 

로마인의 정신적인 측면은 그들의 정책적 결정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에 아주 무관하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국가 규모의 흥망은 제도적 차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만 정신적인 타락만을 이유로 내세우는 이론에 지쳐버린 나머지 정신적인 요소가 갖는 영향력을 너무 배제해버린 것은 아닌지 아쉬운 생각도 들어요.

 

둘째, 셋째 이유는 정말 공감합니다. 기독교를 몰랐던 이들의 삶을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분석할 수는 없죠. 당시 사람들은 미처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던 근현대의 이념적 틀로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이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도 로마인을 이해하는데 특별한 불리함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들 모두가 저마다 기독교를 몰랐던 시절을 갖고 있으며 또 날마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역사 이해에 있어서 다소간의 편견과 게으름을 보인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력이 조금 필요하겠죠?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부분은, 다양한 정치 체제를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체제 전복에 이어 새 이름의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 보다 발전된 정치 체제로의 전환을 경험하지만, 로마는 그 이름과 영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왕정, 공화정, 제정의 세 가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물론 전환 상의 진통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요.

 

저는 사실 정치에 대해 우매한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그다지 잘 알지도 못합니다. 이 나라의 정계 전반에 대해 신뢰와 존경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은 그분들의 탓도 있겠지만 매일의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은 제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지지정당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나라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 어느 쪽이 옳은지도 잘 모르겠는 때가 많거든요. 물론 모든 분야에 전문적일 수는 없으니 매번 좋은 견해를 가질 수는 없겠지만, 제 노력이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도 확실히 듭니다.

 

그래서 어떤 정책이 실행될 때, 그것이 사회 각 계층에게 어떤 유불리를 가져오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저자의 시선은 제게 특별히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관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태만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어쩌면 적극적인 비난보다 무관심이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것은 주요 인물에 대한 저자의 깊은 관심입니다. 로마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라면 누구나, 저자에게 그들의 태생부터 가족, 취미, 이력 등 모든 행적을 공개해야 합니다. 그게 싫으면 역사에서 자신들의 사료를 지웠어야 해요. 그만큼 저자의 정성이 가득하기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한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들의 고유한 개성과 리더십, 삶이 우리에게 그토록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겠죠.

 

소설류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은 그저 반짝반짝 빛나게, 악역은 철저하게 악역으로 그리기 쉬운데 저자의 이야기에서는 다방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소수의 인물들조차도 단점 몇 가지는 드러내야 할 정도니까요. 저자가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학습으로서의 의미 외에도, 저자의 이야기는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중심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내용 전달에 부드러움을 더해준 덕분에 눈앞에서 로마인을 보는듯한 느낌도 받곤 했습니다. 물론 러셀 크로우 주연의 ‘글래디에이터’나 제라드 버틀러 주연의 ‘300’ 같은 영화들의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도 큰 도움이 되었죠. 커다란 참혹함만 빼낼 수 있다면 전쟁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스포츠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저도 소년의 마음으로 전쟁에서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생사가 오가는 칼부림의 현장에서 미묘한 매력 또한 느끼는 것을 보면 저도 남자인가 봅니다. 그래서 군단 전술에 대한 저자의 서술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는데, 그 부분이 잘 와 닿지 않았던 분들은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Felix 행운) 군단의 장군으로서 지금의 독일에 해당하는 게르마니아를 공략하는 장면을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거에요.

 

그렇지만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때문에 해전은 당연히 대포로 박력 있게 싸우는 거라고 여겨왔던 제게, 일단 부딪히고 사다리로 적선에 건너가 싸우는 기원전의 해상 전투 방식은 심지어 아기자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해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어요. 한니발의 긴 압박을 힘겹게 이겨내면서 전략 전술이 향상되기 전에는, 단순하게 양으로 밀어붙이는 로마군의 전투 방식도 안쓰러움을 자아냈죠.

 

그리고 저는 먼 대륙의 타국인으로서 로마를 동경할 뿐 아니라, 현대인으로서도 고대 로마인을 동경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천재성으로 커다란 다윗 상을 만들기도 했던 미술가 미켈란젤로도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 무엇보다도 오묘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식 근로자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제 육체는 그 이상적인 모습과는 괴리가 느껴질 만큼 거리가 큽니다. 안타깝게도 저 뿐 아니라 인류의 상당수가 그렇죠. 비록 모두들 다윗 상의 모습 같지는 않았다 해도 고대 로마인들은 현대인들에 비하면 상당히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당시에도 질병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지만, 질병 외에도 충분히 단련되지 않은 육체 덕분에 이중고를 겪는 현대인이 어느 날 갑자기 고대 로마인의 몸을 입게 된다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아마존 원시부족 ‘조에’의 건장한 남자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짙어지죠.

 

그 외에 로마를 다루면서 빠질 수 없는 그리스 세계와 대표 도시 아테네의 수준 높은 문화 이야기도 흥미로웠고요. 최고의 강인함을 자랑했던 도시 국가 스파르타의 독특한 생활 영위 방식도 새로웠습니다. 독자의 폭넓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주변 국가와 민족들의 독자적 개성을 잘 설명해준 부분도 빠질 수 없는 소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깜짝 등장하는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 같은 인물들도 무척 반가웠죠.

 

 

뒤늦게 밝히지만, 저 같은 그리스도인의 역사 인식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역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의 접촉은 기원전 1세기에 조금씩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의 타민족 역사라고 해서 광대하신 그분의 안배와 성실하신 손길에서 배제된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죠.

 

이런 이유에서라도 저 스스로 좀 더 주의하게 된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즐거움 때문에, 역사 읽기가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세 가지 태도를 말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시간 때우기divertissement’입니다. 즉 삶에서 권태를 느끼는 이들이 스스로의 게으름을 해소하는 분주한 방법인 것이죠. 역사가 지닌 의미가 커다란 만큼 우리도 그 역사 앞에서 보다 겸손히 서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똘레랑스라는 불어 발음으로 관용의 정신이 대두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토인비가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인 로마 연합을 일궈낸 로마인이 지닌 몇 안 되는 본래적 특출함이기도 하지요. 교회사에 대한 저의 관심이 깊은 만큼, 여태껏 교회가 믿음의 가치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지적인 측면에서는 미숙한 태도를 보인적도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중에는 신중하지 못한 정죄도 포함될 수 있겠죠.

 

 

세월이 흘러도 사랑받는 작가에게는 그 또는 그녀만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C. S. 루이스는 ‘회의자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널리 전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젊은 시절 철저하게 기독교를 싫어했던 루이스는 그 자신의 끝없는 지적 고뇌의 길 위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한 시대의 뛰어난 지성으로서 그렇게 험난하게 성경을 진리로 인정하게 된 만큼, 지적으로 회의를 느끼는 다른 수많은 지성인들이 복음을 접하는 또 하나의 통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바울도 인류 역사 상 최고 수준의 지성인이었지만, 아무래도 고대의 인물보다는 20세기를 빛낸 작가가 좀 더 친근하잖아요? 그렇다면 아직도 더 많은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존재적 의미를 더해갈지 기대되기도 합니다.

 

비록 저자가 저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울 점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저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열매가, 시오노 나나미 같은 분들께도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의 동함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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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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