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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얼굴을찾을때까지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일반 > 기독교일반
지은이 C. S. 루이스 (홍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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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참. 이 책의 절정, 오루알이 프시케와 함께 신의 임재를 맞이하는 그 곳의 계절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여름날, 즐겨 쓰는 연필을 끼적이다가 결국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오랜만에 신학이라는 주제에서 잠시 빠져나와 소설을 읽은 소감을 적는데, 그 책의 작가가 또 C. S. 루이스라니. 내 서재도 참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 책은 지난 가을 런던 여행 직전에 쿠가 추천해 준 것이다. 원래 비행기 안에서 읽을 생각이었는데 내 눈은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 책을 읽는데 다른 대단한 것들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그저 진실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마음 자세와, 세상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온 정도의 지성이라면 차분히 읽어나가며 각자의 눈으로 책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건조증과 결막염으로 얼룩진 내 눈인들 문제될 것은 없다. 보인다는 것이 감사할 뿐.

루이스가 내용 전개에 앞서 미리 안내해 주듯, 전체 줄거리를 루이스가 직접 창작해 낸 것은 아니다. 그가 학생이었을 때 읽은 글 중에 아풀레이우스의 변신(황금 당나귀)에 등장하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짧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
굳이 이미 존재하던 글을 재해석해서 써 낸 만큼, 원래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루이스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살펴보는 일도 흥미로운 요소다. 이 글을 쓴 시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이 책의 줄거리에서 그가 특별히 기독교를 강조하거나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화의 틀 속에서 그 세계 안에 자리한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다만 그네들의 존재와 성향에 스스로의 세계관을 적용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사한다(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는 각자의 문학적 수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즉 그가 시사하는 것은 스스로 마주하고 이해하는 세계의 특성의 투영인 것이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주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하며 섬기는 하나님, 그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해 기독교의 그 누군가가 직접 등장인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 종교관과 무관하게 누구라도 이 책의 이야기에 초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그래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춰내면 또 다른 미래의 독자들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 권으로 묶여진 것 치고는 여주인공 오루알의 소녀 시절부터 임종까지를 아우를 만큼 줄거리의 스케일이 꽤 크다. 그런 만큼 줄거리 전체를 관통하는 몇 가지 이야기는 살짝 나눠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이야기의 두드러지는 특징들을 생각해 보면 세상의 단면들에 대한 진솔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왕녀로 태어난 오루알은 세상에서 가장 추한 외모의 여자다. 이 여인이 살면서 사람들의 시선들로부터 겪게 되는 상처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적나라하다. 그리고 이 여인의 어린 시절부터 거의 평생을 스승으로 함께하는 여우 선생은 어쩌면 이 시대의 무신론자들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성과 과학만을 진리로 인정한다. 모든 눈앞의 현상과 사물을 오직 이성의 틀에서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그를 그려 내는 루이스. 이 세상에 그런 인물은 없다는 듯 꾸미거나 가리는 일 따위는 없다. 그리고 많은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도 지성을 키우지 못하고 어른이 된 사람들의 야만성, 평범한 인생들의 무기력함, 삶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조금씩 성장할 때마다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마는 기존의 자아 등을 가감 없이 작품 속에 담아낸다. 더구나 그런 단면들의 모습도 무척 다양하다. 적어도 독자는 루이스가 작품의 저 아래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사실들을 들을 때, ‘당신은 세상의 이런 면들은 똑바로 말하고 있지 않잖아!’와 같은 비난은 할 수 없으리라. 어쩌면 루이스 특유의 변증적 태도가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프시케. 오루알이 어릴 때, 좀 더 어린 프시케가 배다른 여동생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여우 선생의 가르침 아래 함께 즐거움 속에 자라던 그들의 어린 시절은 그들 모두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새겨진다. 그런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 프시케가, 너무나 아름답고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프시케가 살아 있는 제물로 바쳐진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며 평안해하는 프시케와,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절망의 나락에 빠지는 오루알. 프시케의 죽음은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정사실이었으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하는 오루알은 어처구니없게도 더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이성만을 진리로 여기고 신에 대한 이야기는 문학적 유희로만 인정하는 그리스의 철학을 여우 선생을 통해 철저히 습득한 오루알.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만난 프시케는 신의 존재를 말하고, 오루알은 프시케가 미쳤을 거라고 생각하며 거칠게 프시케를 몰아붙이지만 끝내 그녀는 프시케의 말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짧은 순간이지만 프시케를 궁지에 몰아넣은 끝에 직접 신을 대면하고 정확한 뜻조차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 선고를 듣고 만 그녀.
자신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 경험을 지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볼품없던 어린 왕녀는 아버지를 뒤이어 글롬의 여왕이 된다. 나름대로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경험들도 많이 하게 되지만, 마음 속 깊이 묻어 둔 프시케에 대한 감정과 신들을 향한 억하심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 책을 빛나게 하지만 줄거리는 이 정도에서.

결국 이 책(신을 대면하는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은 오루알의 신들을 향한 고소장이기도 한 것이다. 불완전하고 미숙함이 넘치는 사람들에게서 소중한 프시케 마저 빼앗아 버린 그들을 향한 고소장 말이다.
하지만 이 시도에서부터 이 책의 제목의 의미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고소를 공정하게 시작하고 진행하는 순간 자아의 착각에서 빠져나와 부족했던 자신의 참모습을 보고야 만다. 이처럼 한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식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이 기나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스물여덟의 나에게도 신선한 격려가 된다. 나는 이제 한 흐름 정도를 더 보내고 나면 서른이 된다. 이야기 속에서 오루알은 배운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땅에서의 수많은 고뇌와 아픔들은 배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유와 명예를 최고의 기치로 삼는 세상의 풍조 앞에서 자유할 수 없는 사람은 매순간의 가시적인 성과에 매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것에 목을 매냐고? 그렇게 겉으로 내세울 수 있는 무언가라도 없으면 도무지 나의 존재와 의미의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 없으니까. 그런 이들에게 가시적으로 뭔가를 이뤄내지 못한 시절들은 아깝고 무의미한 잊혀야 마땅한 흔적이다. 더불어 육체의 늙음은 그들의 존재를 점점 작아지고 볼품없게 만든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녀이자 제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이란 육체의 젊음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깊은 향을 더해가며 감미로워지는 숙성의 과정이다(고린도후서 4장의 영광스러운 고백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처음엔 냄새가 이상하고 민폐도 끼치고 말하기 부끄러운 일들도 많이 저지르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간다.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면 비평가 송태현의 해설이 짤막하지만 친절하고 세밀하게 덧붙여져 있다. 여기에서 이 분이 잘 정리해 주시지만, 루이스가 그려 낸 등장인물들 속에 조금씩 묻어나는 기독교적인 면들을 발견해 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프시케가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프시케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과 겹치는 이미지가 있다(후에 해설을 참고하라). 이야기의 흐름과 정황을 볼 때 굳이 기독교적 이미지와 연결 지으려는 저자의 의도가 없기에 더더욱 독자 스스로 찾아내는 안목이 필요하다(다만 자연스럽게 피어날 뿐).
특히 대사들을 볼 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오루알의 이 땅에서의 생명이 거의 꺼져 갈 무렵 마지막 이상을 볼 때 그녀 앞에 나타난 프시케가 말한다. “내가 말했잖아요, 마야(오루알의 또 다른 이름).” “우리 사이에 구름 한 점 없이 내 집에서 만날 날이 올 거라고.” 구름 한 점 없이. 나는 이 대사를 읽고 여지없이 또 바울의 예언을 떠올리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또 신을 묘사한 표현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보통 신화에서 여러 신들은 인간(타락한)과 매우 유사하며 그저 외양이 좀 신비롭고 특정한 능력이 초월적인 인간의 모습일 때가 많다. 그러나 마야는 신의 임재 앞에서 말한다. “가장 두렵고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고. 우리는 늘 겪는 자라남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그분의 얼굴을 올바로 그려 낸다. ‘두렵고’를 ‘거룩한’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주님을 향한 표현인 것이다. 루이스의 신화 세계에서 신은 그런 모습이다.

요 몇 년 사이 C. S. 루이스, D. M. 로이드 존스 등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의 글이 꾸준히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폐쇄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성경 읽기도 바쁜데 소설 따위 무슨 소용이냐고 핀잔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걸음 뒤에서 나름의 겸손으로 물러나 자꾸 생각해 볼수록 문학 외에도 각양각색의 예술 형태를 통해서, 그리고 본래는 선한 쓰임새였던 그 모든 방식들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연단되길 바라시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성경적인 세계관이라는 복된 도구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통해서.

이 책을 표지에서부터 한 장씩 넘기다보면 맨 먼저 ‘조이 데이빗먼에게’라는 글귀가 있고, 바로 다음 장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1에 담긴 문장이 보인다.
‘사랑은 너무 어려 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네.’

비록 우리 모두의 입장과 처지는 다르더라도 각자 나름의 모습으로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어떤 모양일까. 그대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께서 그 모양을 날로 가꾸고 계실 것이다.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심장이 유난히 두근거리는 날이면 실수하지 않도록 말수를 줄여야 하는 법인데... 쓰던 글을 멈출 수도 없고. 주님께 저를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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