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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2년 정도는 청소년기부터 조금씩 읽어 온 성경을, 특히 복음서를 보다 풍성하면서도 온전한 시각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4복음서와 그 안에 담긴 주제들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양교수님이 지은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두란노 아카데미에서 다수의 저자들의 협력을 끌어내 엮은 ‘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등이 이러한 과정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도와주었고요. 이번 수난 주간과 더불어 이 글을 정리하는 이 주일 아침까지 약 50일 가까이를 틈틈이 이 책과 함께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서를 올바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데는 여러 훌륭한 선배들이 꼽힐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뺄 수 없는 분이 양교수님인 것 같습니다. 이번 마가복음에서도 전체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정돈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가운데 가장 간결합니다. 모든 복음서가 일차적으로는 저자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기록한 것이기도 하기에, 마가에게는 이러한 간결함이 최선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죄송합니다..-_-)’

이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처음 복음을 접하는 이들에게 4복음서를 읽는 순서를 권한다면 이러한 마가복음의 간결함은 첫 번째로 꼽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이 가장 짧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복음의 핵심을 어설프게 담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간결함은 초보 독자들로 하여금 마태복음에 드러나는 유대적인 면들과 반유대적인 면들, 구약의 섬세한 인용들에 대한 어려움을 처음부터 겪지는 않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해가 잘 안되는데 무턱대고 읽는 것은 내 나름의 해석을 유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섬세한 일하심은 때로는 각 사람의 개성 있는 삶을 드러내며 관여하시기에,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정석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 권할 수 있는 순서를 생각해보자면 ‘마가 – 마태, 누가 또는 누가, 마태 - 요한’과 같은 흐름이 좋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 정황은 마가복음의 저자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베드로와 함께 있던 요한 마가일 것을 뒷받침해줍니다.

먼저는 간결하다는 점인데,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전해 들었다면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확실한 것만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고, 마태나 요한처럼 직접 본 그 분을 전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걸러낼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 내용들은 그 내적 증거와 다른 복음서와 문서들의 비교를 통해 보더라도 사실임이 분명하나, 시간적 순서에 있어서는 상당히 생략적이고 자유로운 구성을 택했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뒤늦게 전해 들은 마가라면 일부러 이야기의 줄거리 자체를 잘 전하는 것을 우선하기 위해 순서를 본인이 편집했을 수도 있지만, 정말 그 순서를 잘 모르고 정한 부분이 있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이죠.

마지막으로 이 짧은 16장의 구성에 비해 베드로에 대한 묘사는 비교적 꼼꼼하다는 점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정황들이 초대 교부들로부터 전해지는 마가의 저작설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100% 알 수 없는 저자 확인보다도, 그 내용의 복음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우리의 주님이시자, 또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전하고 있습니다. 빠른 내용 전개 속에서도 마가는 모든 상황 속 증인들을 기록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마가복음의 위치에 대한 긍정적인 재발견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갑니다. 글쎄요, 아직 결혼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나중에 자녀가 생기면 복음서는 마가복음부터 읽히고 싶군요. 아하하.


솔직히 이 주석은 석의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많이 지루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많은 주석을 두루 참고하면서 별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들까지도 하나하나 꼼꼼히 반박하기 때문이죠. 물론 그것들 중에 바른 석의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읽다 보면 좀 피곤한 것도 사실이에요. 일부 아쉬운 주석들의 경우 참고한다고 해서 최종적인 이해의 풍성함이 늘어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만 일부 올바르지 않은 견해를 분명히 피하기 위해 다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모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에서 정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두 다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솔직히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설교 속에 석의에 기반한 전개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책보다 앞서 석의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1~2년 전 양교수님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등을 읽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석의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글의 뜻을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명사라고 풀이됩니다. 설교의 주제에 앞서 석의에 대한 검토와 묵상이 깊이 진행된 다음 그로부터 주제가 도출되고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 성도들을 위해 필요하다 싶은 주제가 먼저 골라지고 그 선정된 주제를 뒷받침하고자 사방팔방에서 말씀을 끌어다가 적용하는 경우를 볼 때가 많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석의의 측면이 많이 약하기에 예화의 비중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결과적으로 석의의 우선적인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자 애쓴 나머지 복음 안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들에 대한 벅차오르는 감동이 다소 묻힌 채 밋밋하게 전개되는 모습이 아쉽게 나타나지만, 이것은 석의에 대한 노력과 부지런함으로 인해 밝은 미소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마가복음을 이 책 한 권을 통해 스친 뒤 아련한 감상 속에 접어둘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 숨 쉬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묵상할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감내할 필요가 있는 수고입니다. 한 번의 밋밋함으로 남은 시간들의 감동들에 올바름과 풍성함을 더할 수 있다면요.

우리가 복음서를 비롯한 말씀을 읽을 때는 먼저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시며 더불어 교제하시는 그 분의 마음과 생각을 깨닫는 생활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기 위함이며, 이를 위해 깨닫게 하시는 원리들을 우리의 삶에 실천적으로 적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석의가 없는 상태로 올바른 적용이 뒤따를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성경 의존 사색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소망 가운데 그 분의 자녀들에게 말씀을 향한 온전한 열정을 부어 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지성을 영성과 더불어 온전히 주님께 드릴 수 있도록 이끄시기를 간구합니다.

Posted by One of Remn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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